▲국내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습식저장조(사진 좌)과 건식저장조(사진 우)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원자력기술 개발과 관련 사업 육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 5대 원전 강국인 우리나라는 지난 40여 년 간 핵비확산 체제를 준수하는 원전 모범국가이지만 1974년 체결된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에 대한 독자적인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핵연료의 안정적인 공급과 포화상태에 이르는 국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문제해결을 위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과학계를 비롯해 원자력계의 숙원이었다.

22일 오후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박노벽 외교부 원자력 협력대사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협정’ 개정협상에 가서명했다.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재활용(파이로프로세싱)할 수 있는 방안’ 등을 골자로 본문 21개 조항과, 2개의 합의의사록으로 구성됐으며, 이와 관련해 양국은 법제처의 검토와 국무회의 등을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된다. 아울러 미국은 의회 승인 절차를 밟게 되는데 이 같은 양국의 절차가 완료되면 내년 상반기쯤 협정이 발효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0년 10월 시작된 원자력협정 개정협상 과정에서 양국은 11차례의 정례협상과 다수의 수석대표 및 부대표급 협의를 가졌다. 특히 정부는 2014년 3월 18일 개정안 만료를 앞둔 2013년 4월 양국 수석대표협상에서 “기술적·세부적 사항의 복잡성 등을 감안해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한·미 원자력협정 2년간 잠정 연장’ 합의 이후 집중적인 협상을 전개했다.

◆새 협정 개정안, 세계 5대 원전國 위상 반영돼
이번 개정에는 국내에서 사용된 사용후핵연료를 ▲중간저장 ▲재처리/재활용(파이로프로세싱) ▲영구처분 ▲해외 위탁재처리 등 안전한 관리를 위해 어떠한 방안을 추진하게 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협력방식을 협정에 포함시켰다.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현재 우리가 보유한 시설(현존 연구시설)에서 ▲조사후시험(照射後試驗, Post-Irradiation Examination) ▲전해환원(電解還元, Electro-reduction) 등의 형상‧내용 변경활동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게 됐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파이로프로세싱 시험시설인 ACPF(Advanced spent fuel Conditioning Facility)를 구축해 사용후핵연료 전처리 공정 및 전해환원 공정 등 파이로프로세싱의 단위 공정 기술을 연구개발 해왔다.

아울러 양국이 공동연구하고 있는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기술에 대해서는 한‧미 핵연료주기 공동연구(2011-2020)를 바탕으로 한 협의를 통해 합의해 추진할 수 있는 경로를 협정에 규정했다.

원자력계 복수의 관계자는 “공동연구 결과를 기술적 타당성, 경제성, 핵비확산성 등 세부 기준과 구체 절차에 따라 평가해 파이로 활동에 대해 장기동의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며 “이러한 재처리/재활용 조항은 창의적 방식으로서 우리가 현재 보유한 시설에서의 활동에 대한 제약은 풀고 필요시 미래 활동을 추진해 나가기 위한 추진경로(pathway)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원전연료 수급 불균형시 상호 공급지원도 협의
이번 개정에는 핵연료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우리나라에 대해 미국이 원전연료 공급을 지원하도록 규정하는 한편 향후 미국산 우라늄을 이용한 20% 미만의 저농축이 필요하게 되면 협의를 통해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양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한 제3국에 대해서는 국내 원자력산업계가 미국산 핵물질, 원자력 장비 및 부품 등을 자유롭게 재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포괄적 장기동의도 확보했다.

수출입 인허가를 보다 신속히 하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핵물질이나 장비, 부품, 과학기술 정보를 서로 활발히 교류해 원전수출 투자나 합작회사 설립 등을 촉진한다는 내용도 추가됐다.

새로운 협정은 현재 우리나라가 추진 중인 의료용 방사성동위원소 본격 생산의 길을 여는 성과도 거뒀다. 지금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던 암 진단용 방사성동위원소(몰리브덴(Mo)-99)를 미국산 우라늄을 이용해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수출할 수 있도록 미국의 장기동의를 확보했다.

이는 125만 명에 달하는 암환자에 대한 핵의학 진단 등 우리 국민의 보건 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양국의 협력방안을 규정하는 그치지 않고 차관급 상설협의체에서 이행을 추진하고 점검해 나가기로 했다. 협의체는 ▲사용후 핵연료 관리 ▲원전연료의 안정적 공급 ▲ 원전수출 증진은 물론 ▲핵안보 분야까지 다루는 4대 실무그룹을 산하에 두고 양국의 원자력협력 전반을 상시적으로 다룬다. 향후 파이로나 저농축 추진에 관한 사항도 바로 이 고위급위원회를 통해 이뤄진다.

◆박노벽 대사 “核주권 존중과 상호적 권한 행사 확인”
새 원자력협정 서문에는 한미 양국은 핵비확산 조약(NPT)의 당사국으로서 원자력을 평화적 목적으로 연구‧생산 및 이용함에 있어서 갖는 ‘불가양의 권리(inalienable right)’를 확인하는 동시에 양국간 원자력 협력을 확대함에 있어 주권의 침해가 없어야 함을 명시했다.

더 나아가 양국이 평등과 호혜의 원칙, 예측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장기 계획과 지속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필요성 등을 재확인했다.

박노벽 외교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 전담대사는 “이번 개정 협정은 우리 원자력 활동의 자율성을 중첩적으로 보장하는 명시적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박 대사는 “특히 농축과 재처리 등 형상‧내용 변경을 포함한 제반 원자력 활동에 있어서 ‘상대방의 원자력 프로그램을 존중하고 부당한 방해나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무규정인 소위 ‘골드 스탠다드’로 알려진 농축‧재처리 포기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양국간 원자력협력의 안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측면과 우리 원자력계의 역동적인 발전 가능성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모두 감안해 유효기간을 20년으로 대폭 단축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협정 만료 2년 전에 일방이 연장거부를 통보하지 않으면 협정은 1회에 한해 5년 연장될 수 있지만 일방 당사국이 1년 전에 사전 통보만 하면 어느 때나 협정을 종료시킬 수도 있다.

◆원자력계, 원자력협정 체결한 제3국 원전수출 기대
한편 ‘한‧미 원자력협정’ 전면 개정 소식을 접한 국내 원자력계는 상당히 고무적인 분위기이다.

그동안 국내 과학계와 원자력계는 ▲한국정부의 핵비확산체제 ▲23기 국내 원전에 대한 원료의 안정적 공급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문제의 해소 등을 위해 농축과 재처리는 필수적이라는 입장이었다. 특히 파이로 프로세싱을 통한 기술적 난제들의 해결 가능성을 들어 협정의 전향적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원자력계 복수의 관계자들은 “새로운 개정은 다른 원자력협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명시적인 권리 확인인 동시에 미국의 일방적인 통제권만 규정돼 있던 체제에서도 완전히 탈피해 상호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들은 “실제로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에 대해 미국의 회의적인 평가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지난 40여 년간 핵비확산 체제를 준수하며 핵비확산 모범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이 농축기술을 전용할 것이라는 미국의 억측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파이로프로세싱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미래 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경로를 열어둔 점은 물론 원전연료 확보 측면에서도 이번 개정안은 우리로써 큰 수확”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2009년 UAE 원전 수주경쟁 과정에서 당시 경쟁사(아레바)가 우리나라가 성형가공 이외에 원전연료 공급능력이 없어 “안정적인 연료 공급이 어렵다”는 취약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한 사례가 있다. 이에 원전연료 자체 공급능력 확보가 국내 원전의 안정적 수급은 물론 원전 수출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확인한바 있다.

무엇보다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는 원자력 기자재업계는 “미국산 주요 장비가 포함된 국내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에 대해 미국 정부가 일정한 권한을 행사하듯이 국내 원자력산업계가 수출한 장비를 장착한 미국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가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개정은 실질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